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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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자 기고 > 슬픔을 통과하는…

김지민 작가 또, 가슴에 묻었다. 웃고 지내다가, 음식을 먹다가도 감정의 밑바닥에서 뭔가가 치밀어 올라온다.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면 쿵 하고 모든 장기가 내려앉는 것 같다. 누군가는 슬픔에 기간을 정해 놓았지만, 지구가 멸망해도 끝날 수 없는 슬픔이다. 일 년 후, 십 년 후, 내가 살아 있는 한 미안하고 슬퍼할 것이다. 애도는 그런 것이니까. 하루하루를 산다는 건 어쩌면 슬픔을 통과하는 여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많은 사람이 슬픔에 갇혀 고통의 시간을 보낸다. 사람으로 사는 이상 누구도 자유로울 수는 없다. 계절이 하는 일이 낙엽을 떨구는 일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상실의 아픔을 혼자서 감당하도록 내버려 두지 말아야 하는 일이다. 그다음은 누군가 대답해야 할 목소리와 시간이 해야 할 몫이 남겠지. 요 며칠 편안하게 잠드는 게 힘들다. 밤새워 뒤척이다 새벽이면 자리에서 일어난다. 오늘도 다섯 시쯤 창문을 열었다. 밖을 내다보니 가로등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마치 노란 조등처럼 허공에 흐릿하게 번지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했다. 뿌연 습도가 앞 동의 윤곽을 삼켜버린 시간, 밤사이 켜졌던 가로등이 꺼지고 검푸른 빛이 돌며 어스름한 시간이 올 때까지 나의 시선은 바깥을 향해 있었다. 오전의 햇살이 무거운 암회색 공기층을 통과해보려고 애쓰는 동안 바람은 나무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듯했다. 순식간에 노랗고 빨간 낙엽이 바닥에 층층이 쌓였다. 층층이 생각이 많아졌다, 생각이 겹겹이 많아질수록 허무했고, 헛헛했고, 공허했고…. 비슷한 감정의 단어들이 함께 쌓였다.

[사설]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가…

왜 우리는 이런 국가에서 살고 있는가? 왜 우리는 국가로부터 온전히 보호받지 못하고, 20·30대 소중한 청년들을 저 먼곳으로 보내야만 하는가? 이태원 참사로 중상을 입고 입원 치료중이던 20대 여성이, 지난 13일 숨지면서 이번 참사의 사망자는 158명, 부상자는 196명으로 집계되었다. 먼저 부상자들의 쾌유와 희생자들의 명복을 빈다, 아울러 유가족들에게 마음을 다해 위로를 전한다. 사건 발생이후 일련의 수습과정을 지켜보면서 참담한 심정을 이루 표현할 길이 없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천재지변도 아닌데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다는게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 그것도 대명천지에 서울 한복판에서 말이다. 축제의 주관단체가 특정되지 않아 사전 안전관리가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는 말은 그야말로 핑계에 불과하다. 같은 시각에 참사 현장과 멀리 떨어지지 않은 대통령실 주변의 그 수많은 경찰인력은 대체 무엇으로 설명할것인가? 핼러윈을 앞둔 주말이었고, 코로나19에 대한 방역 조치가 완화돼 3년 만에 열리는 축제이니 만큼 이태원에 많은 인파가 몰릴 것은 예측이 가능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하루 전날인 금요일에도 이태원 골목 곳곳에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몰려 들었다는 현장 상인들의 목격담이 이어졌다. 상황이 이 정도였다면 주체가 없는 행사였다 하더라도 국가는 일반국민이 생각하지 못하는 더 다양한 상황을 고려하여 국민의 생명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 현행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과 소방방재청의 안전매뉴얼에는 재난이 발생할 수 있는 행사에 대해 지방자치단체장과 소방방재청이 안전을 관리하도록 명시되어 있다.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니 이게 국민 안전과 재난 대책을 총괄하는 행안부 장관이 할 말인가. 관계 당국은 이 참사의 진상을 소상히 밝히고, 철저한 책임 규명을 하여 무책임한 행태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막연하게 다 책임지라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둥 ’폼나게 사표‘ 등을 운운하며 변명을 일삼지 말고 막강한 권력에 동반되는 막중한 책임을 다해주기를 간곡히 요청한다. 우리는 국민의 안전을 최우선 가치로 여기는 참다운 리더가 필요하다. 그런 국가에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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